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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oons' Life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본문

Book.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jhoons 2016. 12. 4. 06:05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을 가진 프리드리히 니체가 갈고 닦은 철학의 정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건, 인간이 자기 자신의 힘과 의지만으로 삶을 긍정해낼 수 있는가 하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다시말해, 신의 존재와 가호를 전제하지 않고서도 삶의 긍정할 수 있는지, 더 나아가 신을 중심으로 한 우주의 질서를 상정하지 않고도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이 되는 도덕관념을 구성해낼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안타깝게도 이 책은 읽었다기보단 구경했다고 보는게 맞을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방대한 상징 체계와 성경을 비롯한 고문헌을 자주 인용한 탓에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비판을 하는건지 칭찬을 하는건지 조차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전체 책 내용의 5% 이하를 이해한 기분이라 독후감을 쓰는 것 조차 망설여 졌을 정도다. 하지만, 위대하신 니체옹께서는 책의 부제를 <만인을 위한 그리고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고 달아두시면서, 독자들의 자유로운 해석과 오독을 허락하셨기에 용기를 내서 나의 이해 및 오해를 끄적여 보기로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고대 페르시아에 번성했던 종교 ‘조로아스터 교’ 교조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기원전 1800년에서 기원 640년 사이에 창시된 것으로 알려진 이 종교는 ‘아후라 마즈다’라는 창조신을 섬기며 악의 신 ‘앙그라 마이뉴’에 맞서 싸우고 선(善)을 지킬 것을 권하는 종교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기원전 20세기 전후의 인물인 걸 고려하면, 인간이 신과 첫 대면을 하던 시대의 대안적 영웅인 셈이다. 조로아스터교의 교리가 충분히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화살을 잘 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 페르시아인의 용기와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위용에 비추어 보면 조로아스터 교가 가진 진취성과 독자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 기독교적 도덕관념을 타파하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도덕을 찾는 것을 제1목표로 삼는 니체에게 있어, 차라투스트라는 아브라함계가 섬기는 유대신(엘로힘, 알라)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 조로아스터교의 교리가 공백상태로 남아있어서 니체의 생각을 부어 넣을 공간이 많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를 기독교적-형이상학적 도덕관념이 지배하고 있는 근대유럽으로 끌어와 니체 자신의 철학과 세계관을 소개하는 대변인으로 삼는다.


   보라! 나는 꿀을 너무 많이 모은 벌처럼 나의 지혜에 지쳤고, 나는 나를 향해 내미는 여러 손이 필요하다. 나는 증여하고 나누어 주고 싶다. 인간 가운데서 현명한 자들이 다시금 어리석음을, 가난한 자가 다시금 풍부함을 기뻐할 때까지. 그러므로 나는 밑바닥으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대가 저녁에 바다속으로 떨어져 하계를 비추는 것처럼, 그대 충일하는 천체여! 나는 인간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려고 하거니와 인간들의 명칭에 따르면 나는 그대와 마찬가지로 몰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니체는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에서 “나는 이 저서로 지금까지 인간이 받은 선물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을 선사한 것이다. 몇천년에 걸쳐 가슴을 울려줄 소리를 가진 이 책은 세계의 최고의 책이며 정녕 주령의 분위기를 가진 책이다.” 라고 말했다. 니체는 꿀을 너무 많이 모은 벌처럼 자신의 지혜를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마음, 증여하고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 


   그가 진실을 증여하여 변화시키고 싶었던 자들은 잘못된 도덕관념을 설파하는 자들, 그들의 영향을 받아 순종을 미덕으로 여기는 노예들이다. 그들은 사랑, 창조, 동경, 별, 행복 등의 추상적 가치를 숭배하고, 대지를 무시한채 하늘을 가리키며 형이상학을 논하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병에 걸리는 것, 의심을 품는 것, 인간과 부딪치는 것은 죄악이다. 목숨을 걸고 싸웠더라도 내일이면 화해를 해야만 한다. 그것이 건강에 좋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을 ‘최후의 자들’ 혹은 ‘배후세계론자들’이라고 비꼰다. 니체가 그들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근거는 간단하다. 신이 죽었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물었다. “그러면 성자께서는 숲속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성자는 대답했다. “나는 노래를 짓고 이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나는 노래를 지을 때 웃고 울고 중얼거린다. 이렇게 나는 신을 찬양한다. 노래하고 울고 웃고 중얼거리며 나는 신, 나의 신을 찬양한다. 그런데 그대는 우리에게 어떤 선물을 갖고 왔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 말을 듣고 성자에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나는 당신께 드릴 만한 것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가 당신에서 아무것도 빼앗지 못하도록 빨리 보내주십시오!” 이렇게 노인과 장년의 사내는 헤어졌다. 두 어린애가 웃듯이 웃으면서.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혼자 있게 되었을 때,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 살고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것에 대해 전혀 듣지 못했구나.”


   니체는 최후의 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을 낙타에 비유한다. 낙타가 등에 짐을 짊어지고 주인의 명에 따라 발걸음을 하듯이, 형이상학자들이 신을 근거로 만들어낸 의무를 따르고 타율적 도덕에 복종하는 자들을 비꼰 것이다. 니체는 그들이 더 나은 인간이 되기를 바랬다. 


   낙타를 벗어나 사자가 되기를, 그리고 위대한 정오를 넘어 어린애가 되기를 기원했다. 여기서 사자는 자유를 갈망하고 고독을 견디는 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가혹한 자기부정과 철저한 자유정신, 그리고 비판정신을 갖추고 스스로 주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그 상태는 기존의 도덕관념으로부터 벗어난 탈주자의 상태에 불과한 것으로, ‘도덕의 자기초극’을 달성해야만 그 다음 단계인 어린애, 초인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도덕의 자기초극’은 인간이 하늘이 아닌 대지와 자기 자신을 기초로 스스로 일어서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니체가 어린애를 초인에 비유한 것은, 형이상학자들의 때가 타지 않은 아이들만이 자기 자신에 기반하여 세계를 이해하고 절대적이고 순수한 자기긍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면 울고, 졸리면 울고, 안기고 싶을 때면 우는 아이는 그 자신의 욕망에 가장 용기있고 솔직한 존재다. ‘내가 지금 울면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고단하실까. 이는 효(孝) 사상에 어긋나는 배은망덕한 행위이니, 배가 고프지만 조금만 참았다가 울어야겠다’ 따위의 고민은 없다. 어린애와 같이 도덕의 자기초극을 달성한 초인은 이제 세계의 원리로 확대하여 ‘권력에의 의지’로 나아간다. 나는 권력을 ‘남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게 만드는 힘’이라고 이해한다. 그렇다면, 니체의 초인은 철저히 자기 존재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갖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평화를 깨트리는 것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선’과는 멀어도 한참은 멀리 떨어진 도덕이다.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든 도덕인 것이다.


   그대들의 적을 그대들은 찾아야 하고 그대들의 전쟁을 그대들은 수행해야 한다. 그대들의 사상을 위해서! 그리고 그대들의 사상이 패배하더라도 그대들의 성실성은 이 패배를 넘어서서 승리의 함성을 질러야 한다! 그대들은 새로운 전쟁의 수단이 될 때에만 평화를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장기간의 평화보다는 잠시동안의 평화를. 그대들에게 나는 노동이 아니라 전쟁을 권한다. 그대들에게 나는 평화가 아니라 승리를 권한다. 그대들의 노동은 전투이고 그대들의 평화는 승리이기를!


   장기간의 평화보다는 잠시동안의 평화를, 노동보다는 전투를, 평화보다는 승리를 권하는 초인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잔인한 소리를 하는 것일까? 그의 근거는 이 책의 후반부에 차라투스트라의 깨달음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니체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우주관인 ‘영원회귀설’이 바로 그것이다. 


   “그대가 싫증을 낸 인간, 왜소한 인간이 영원히 회귀하는 것이다.” 나의 슬픔은 이렇게 하품을 하고 발을 질질 끌며 걸어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에게는 인간의 대지는 동굴로 변했고 이 대지의 가슴은 함몰했고, 나에게는 모든 생명 있는 것은 인간의 부패물, 뼈, 썩어빠진 과거가 되었다. 나의 탄식은 모든 인간의 무덤 위에 앉아서 이미 일어설 수 없었다. 나의 탄식과 물음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투덜거리고 질식하고 갉아먹고 탄식했다. “아, 인간이 영원히 회귀하다니! 왜소한 인간이 영원히 회귀하다니!” 나는 일찍이 최대의 인간과 최소의 인간의 나체를 본 적이 있었다. 서로 너무나 닮았고 최대의 인간조차도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보라, 우리가 그대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알고 있다. 만물이, 그리고 만물과 함께 우리 자신도 영원히 회귀하며 우리는, 그리고 우리와 함께 만물도 이미 무한한 횟수에 걸쳐 현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가르친다는 것을). 생성의 커다란 해(年), 커다란 해라는 괴물이 존재한다고 그대는 가르친다. 이 해는 새로이 흘러가고 흘러나오기 위해서는 모래시계처럼 언제나 다시 새로이 역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이 해 자체는 최대의 것에 있어서나 최소의 것에 있어서나 동일하고, 그러므로 우리 자신은 모든 커다란 해에 있어서 최대의 것에 있어서나 최소의 것에 있어서나 우리 자신과 동일하다. 따라서 그대가 지금 죽기를 바란다면, 오 차라투스트라여, 보라, 그때 그대가 그대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지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대의 짐승들은 그대에게 아직은 죽지말라고 간청한다! 그때 그대는 떨지 않고 오히려 크게 기뻐서 안도의 숨을 쉬면서 말하리라. 커다란 무게와 무더위가 그대로부터 제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 가장 인내심이 강한 자여! ‘지금 나는 죽어서 사라진다.’ 그대는 말하리라. ‘그리고 나는 당장 무가 된다. 영혼은 육체와 마찬가지로 죽는 것이다.

   

   영원회귀설은 아주 간단한 이론이다. 사후세계란건 허구에 불과하고 내가 죽고 나면, 다만 똑같은 삶을 영원히, 무한히 되풀이할 뿐이라는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나는 그 고통스러운 수능을 다시 봐야하고, 오늘 아침에 먹은 치킨너겟을 다음 생애 정확히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또 먹을 것이며, 모지란 머리를 쥐어짜면서 또 다시 독후감을 쓰고 있을 것이다. 아.. 이 얼마나 무서운 세계관인가. 만족할 만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별 불만 없겠지만,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자들에게 이만큼 괴로운 세계관이 또 어디있겠는가. 니체는 참 잔인한 세계관을 발명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절망적인 세계관을 제안하면서도 ‘초인’을 그 해결책으로 내민다. ‘지금 현재’가 영원히 돌아온다면 어찌 ‘지금 현재’에 충실하지 않겠는가! 어찌 지금 내 존재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며, 어찌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한 투쟁을 두려워하겠는가! 배후 세계론자들이 말하는 자기희생과 평화를 지키다간, 나는 노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채 엉망이 된 삶을 무한히 반복해야만 한다. 그들의 헛소리를 멈추게 하고, 나는 나의 삶을 고양시키는데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영원회귀설에 의하면, 자연스레 이런 결론이 도출되며 현실과 대지, 자기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어린애와 같이.


   그대들의 마음을 고양하라, 나의 형제들이여, 높이! 더 높이! 그리고 제발 다리도 잊지 마라, 그대의 다리도 들어 올려라, 그대들 멋지게 춤을 추는 자들이여, 그리고 더 좋은 것은 물구나무를 서는 것이다! 행복하면서도 둔한 짐승들도 있다. 처음부터 발이 무딘 자들도 있다. 그들은 이상하게 도 물구나무를 서려고 애쓰는 코끼리처럼 애를 쓴다. 


   제발 바람처럼 행동하라, 산 위의 동굴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바람은 자신의 피리 소리에 맞춰 춤추려 하고, 이 바람의 발자국 밑에서 바다는 떨며 깡총 거린다. 나귀에서 날개를 달아주고 암사자의 젖을 짜는 이 좋고 분방한 정신은, 마치 폭풍처럼 모든 오늘과 모든 천민에게 불어오는 이 정신은 찬양받으라. 엉겅퀴 같은 머리, 사소한 일에 구애되는 머리, 그리고 모든 시든 잎과 잡초에 적의를 품는 (이 정신은), 풀밭 위에서처럼 늪과 우수 위에서 춤을 추는 이 사납고 좋고 자유로운, 폭풍 같은 정신은 찬양받으라!


   얼마나 많은 일이 아직도 가능한가! 그렇다면 제발, 그대들 자신을 넘어서서 웃는 것을 배워라! 그대들의 마음을 고양하라, 그대들 멋지게 춤추는 자들이여, 높이! 더 높이! 그리고 제발 좋은 웃음도 잊지 마라! 웃는 자의 이 면류관, 이 장미화관,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에게 나는 이 관을 던져준다! 나는 웃음이 신성하다고 말했다. 그대들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제발 - 웃는 것을 배워라!


   니체는 고문서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온갖 비유와 상징을 곁들여 가며 자신의 철학을 글로 옮겼다. 니체는 이 책을 통해, 당대 유럽의 정체성을 규정한 기독교적 도덕관념과 그로부터 야기된 억압기제, 그리고 억압된 욕망들이 만들어낸 신경증들을 치유하고자 했다. 기독교적 도덕관념, 그 기저에 깔려있는 합리적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비판하고 이를 대체할 도덕, 나 자신의 가치를 극대화 할 수 있는 세계관과 새로운 도덕을 제안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순환적 세계관을 발명해냈다.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불리지만 이 책에서의 니체는 파괴자가 아닌, 오히려 건축가의 모습에 가깝다.  그리고 그 건축물은 하늘과 신을 위한 것이 아닌 그 건물 안에서 부대끼며 살아갈 인간을 위한 것이다. 


   사실, 니체가 제안한 ‘어린애’의 도덕은 현실 세계에 적용하기는 무리가 있다. 굳이 칸트의 정언명령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모두가 자기 욕망에만 충실하다면 인류가 여태 만들어온 질서와 평화가 다 깨지게 되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가 비판하는 ‘노예의 도덕’ 보다 더 많은 노예들을 양산할 수 있는 위험한 도덕으로 변질될 수 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로 돌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을 배제한채 극도로 신이 규정한 질서와 현실로부터 괴리된 추상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자들에 경종을 울리고 새로운 관점을 제안한다는 점에서, 니체의 과격한 제안은 충분히 받아들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신이 죽었다’라는 니체의 살벌한 표현은 신에 의존해야만 자기 존재 가치를 찾아낼 수 있는 이들에게 자신의 존엄성을 증명하기 위해 굳이 전능한 존재를 끌어올 필요가 없음을 알려주는 선언이자 그의 바램인 것이다. 


   요즘들어 힐링을 주제로한 강연들이 많이 눈에 띈다. 죽을 노력을 다해서 대학을 가고, 열심히 스펙을 쌓아도 안정적인 삶은 커녕 취직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젊은이들 앞에 선 강사는 ‘여러분, 그대로도 괜찮다’라는 말로 그들을 위로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면서 , 니체야말로 원조 힐링 강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승인이 없이도 자기 존재를 최고로 여기고 삶을 고양시킬 것. 어쩌면, 니체는 사람들에게 이런 위로를 들려주기 위해 펜을 들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는 이 책의 마지막 문단에 드러난 차라투스트라의 퇴장 장면이다. 


   자! 사자가 왔고 나의 어린애들은 가까운 곳에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성숙했다. 나의 때가 온 것이다. 이것은 나의 아침이다. 나의 낮이 시작된다. 자, 떠올라라, 떠올라라, 그대 위대한 정오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고, 어두운 산 위에서 솟아오른 아침의 태양처럼 불타오르면서 씩씩하게 그의 동굴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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