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hoons' Life
칼의 노래 - 김훈 본문
사는건 쉽지 않은 일이다. 삶은 (타인이 지시한 것이든, 시스템이 정한 것이든, 본인이 계획한 것이든) 기한 내에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잠깐씩 찾아오는 여유도 있지만, 그 시간이 끝나면 자기의 몫을 다하기 위해 다시금 일어서야 한다. 하루의 무게란 그 길을 들어서기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거운 것이다. 더 이상 길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 발걸음은 더 무거워 진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죽음이 기다린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무게는 더해진다.
역사는 무거운 하루를 견뎌낸 인물들로 가득하다. 이순신 장군이 그러했다. 때는 선조 25년(1598년), 임진왜란이 시작된다. 일본 열도를 통일한 오다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 그는 오다노부나가의 죽음 뒤에 정적들을 제거하며 일본의 정점에 오른다. 쿠테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히데요시는 남은 막부의 가신들을 달랠 필요가 있었다. 그는 다른 가신들에게 조선을 정복한 후 이를 골고루 나눠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가신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조선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시작된다.
소설 <칼의 노래>는 이순신이 조선 수군을 총책임지는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서 한차례 쫓겨나 백의종군 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가 통제사 자리를 떠나고, 사태는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었다. 그가 떠난 자리에 앉은 원균은 칠천량 전투에서 조선 수군의 8할을 잃는 참패를 겪는다. 육지라고 별다를 바 없었다. 권율 장군이 직접 방어한 지역과 몇몇 의병들의 승리를 제외하면 조선 육군은 패전을 거듭했고, 육지의 전선은 계속 북상하고 있었다. 일본군 손에 자비는 없었다. 차지한 마을의 조선인은 죽이거나, 노예로 삼거나, 강간했다. 모든 곡식은 일본군의 군량미로 전환되었고, 식량을 잃은 조선인은 아사했다. 임진년 이후, 조선은 지옥 그 자체였다.
나는 적의 적의(敵意)의 근거를 알 수 없었고 적 또한 내 적의의 떨림과 깊이를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서로 알지 못하는 적의가 바다 가득히 팽팽했으나 지금 나에게는 적의만이 있고 함대는 없다.
이길 방법은 없었다. 방법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조선군의 총사령관인 도원수 권율은 이순신에게 희망을 걸어본다.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올랐지만, 남은 병력은 12척의 전투용 함선, 200명도 안되는 수군이 전부였다. 수 백척의 전선을 보유한 일본에 비하면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병력이다.
내 끝나지 않은 운명에 대한 전율로 나는 몸을 떨었다. 나는 다시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수군통제사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전라 좌수사였다. 나는 통제할 수군이 없는 수군통제사였다.
우수영에서 내 군사는 백이십 명이었고 내 전선은 열두 척이었다. 그것이 내가 그 위에 입각해야 할 사실이었다. 그것은 많거나 적은 것이 아니고 다만 사실일 뿐이었다.
수군이 비록 외롭다 하나 이제 신에게 오히려 전선 열두 척이 있사온즉 ...
그리고 나는 한 줄을 더 써서 글을 마쳤다.
...... 신의 몸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에는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삼도수군통제사 신臣이李 올림.
이순신은 군령을 바로 세우고, 적은 병력이나마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적의 정보를 염탐하고, 적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전장을 발굴해 기적같은 승리를 거듭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는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에서 그 전과는 정점을 찍는다. 명량에선 12척의 배로 적선 300여척을 무찔렀고, 노량에선 150척 남짓의 조선-명 연합군 병력으로 일본의 500척이 넘는 함대에 승리를 거두었다. 대장장이들이 선물한 칼에 새겨진 글귀는 허언이 아니었다.
一揮掃蕩血染山河
(일휘소탕혈염산하)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해전의 신, 이순신의 적은 일본군 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선조는 약해진 왕권을 놓칠까 두려워 이순신을 비롯한 강자들에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선조는 이순신의 동향을 지속적으로 보고받기 원했고, 역모를 저지르지 않을까 두려워 시찰단을 보내기도 한다. 이순신이 모든 것을 걸고 왕을 지키고 있을 때, 역설적이게도 왜군은 이순신을 왕으로부터 지키고 있었다. 이순신은 양방향에서 자신의 목을 노리는 것을 알면서도, 의미있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한편, 이순신에겐 또다른 적이 있었다. 그 적은 한 인간으로서 가진 자신의 평범성이었다. 이순신은 조선의 운명을 결정할 위치의 지휘관이었지만, 그는 적장의 배에 올라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여진'의 남자이기도 하였으며, 일본 자객에 암살당한 사랑하는 아들 '면'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전략적 이유로 떠나야만 하는 섬의 주민들의 통곡소리와 적군이었던 포로들의 구슬픈 울음소리에 가슴 아파하는 보통 사람이었다. 자신의 병사들을 먹여 살리는 것조차 가까스로 해내는 가난하고 초라한 리더였다.
나는 울음을 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포로들은 모두 각자의 개별적인 울음을 울고 있었다. 그들을 울게하는 죽음이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죽음을 우는 그들의 울음과 그 울음이 서식하는 그들의 몸은 개별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 개별성 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는 나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 때, 나는 칼을 버리고 저 병신년 이후의 곽재우처럼 안개 내린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개울물을 퍼 먹는 신선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적은 적의 개별성이었다. 울음을 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적의 개별성이야말로 나의 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끼니때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새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었고 옆으로 밀쳐낼 수도 없었다. 끼니는 새로운 시간의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먹든 굶든 간에, 다만 속수무책의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이순신은 그 적들을 마주함에 수반하는 고통을 묵묵히 견디며 작전을 수행했다. 한 인간으로서 겪는 아픔을 애써 모른체하고, 임금으로부터 언제 내려질지 모를 무의미한 죽음의 악몽을 견디며, 0에 수렴하는 승률을 한 치라도 늘리고자 모든 힘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그는 노량의 바다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바람결에 화약 연기 냄새가 끼쳐왔다. 이길 수 없는 졸음 속에서, 어린 면의 젖냄새와 내 젊은 날 함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안개 냄새와 죽은 여진의 몸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냄새들은 화약 연기에 비벼지면서 멀어져갔다. 함대가 관음포 내항으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관음포는 보살의 포구인가. 배는 격렬하게 흔들렸고, 마지막 고비를 넘기는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선창 너머로 싸움은 문득 고요해 보였다.
세상의 끝이 ....... 이처럼 ...... 가볍고 ...... 또 ......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 이 세상에 남겨놓고 ...... 내가 먼저 ......, 관음포의 노을이 ...... 적들 쪽으로 ......
이 문단은 이순신이 죽기 직전에 독백하는 장면이다. 그는 죽음의 순간에 조선을 지옥으로 만든 일본군의 함대를 침몰시키며 복수하는데 성공했으며, 왕에게 죽임을 당하는 무의미를 피하는데도 성공했다. 그는 그런 자신의 죽음에 안도한다. 그는 '의미있는 죽음'을 위해 그 잔인하고 힘겨운 하루하루를 견뎌낸 것이다. <칼의 노래>는 역사의 한 장면을 재미있게 소개한 역사소설이기도 하지만, 고통스러운 끼니의 연속을 견뎌낸 이순신, 한 개인의 이야기여서 더 감명깊게 읽힌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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